5월 7, 2019

검은 그림들: 아들을 잡아 먹는 사투르누스

프란시스코 고야, 스페인, 1746. Saturn Devouring His Son, c. 1819–1823. Oil mural transferred to canvas, 1.43m x 81cm. Museo del Prado. ©public domain

우리는 시각, 청각, 촉각 등의 복합적인 감각을 사용하여 주어진 공간이나 상황에 대해서 인지하고 파악합니다. 그중 하나인 귀는 소리를 전달하는 기능 외에도 공간을 지각하게 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는데요. 예를 들자면 반고리관은 몸의 회전을 감지하고 전정기관은 중력 자극을 받아들여 신체의 위치를 확인합니다. 귀가 들리지 않게 되면 우리 눈 앞에 어떤 공간이 펼쳐질까요? 청각 장애를 앓은 고야의 ‘검은 그림’에서 그의 급격한 작품 세계의 전환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1746년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고야는 어린 시절부터 타고난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40세의 나이로 꿈에 그리던 궁중화가 자리에 오름과 동시에 그가 바라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고야는 귀족 사회와 활발히 교류하기 시작했고, 왕실과 가까운 곳에 거주하며 왕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고야는 스페인 왕가가 세 번이나 교체되는 동안 궁정화가로서 안락한 삶을 누렸으며, 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은 화사하고 명랑한 인물화와 기록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프란시스코 고야 초상화>, 비센테 로페스 이 포르타냐(Vicente López Y Portaña), c.1826.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고야의 판화집 [카프리초스(Caprichos, 변덕)]의 부제로 붙여진 문장 그대로, 고야의 화풍은 말년에 이르러 급격하게 그로테스크하고 어두워집니다. 1819년 고야는 72세의 나이에 마드리드 외곽의 별장을 구입하고 세상과의 접촉을 끊은 채 ‘검은 그림(Black Painting)’ 연작을 그리며 지냈습니다. ‘검은 그림’은 저택의 하얀 내벽을 덮은 검은색 바탕과 특유의 기괴하고 잔인한 분위기로 인해 그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검은 그림’에서 고야는 일그러진 사람과 동물의 형상을 통해 신화나 성서, 민간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풍자적으로 표현하여 사회의 추악한 현실을 고발합니다. 그 사이에 고야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략의 잔인함, 정권 교체 후 궁정화가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 아내와의 이별로 인한 고독감 등 몇 개의 대표적 사건을 떠올릴 수 있지만, 이렇게 끔찍한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에 대해서 고야 본인이 밝힌 내용이 없어 정확한 이유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귀머거리의 집 (Quinta del Sordo)’에 고야가 붙여 주었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청력 상실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46세 고야는 심한 어지러움을 겪으면서 이명이 들린다고 호소했고 시력과 청력이 나빠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시력은 회복했으나 청력은 나아지질 않았다고 합니다. 말년의 고야가 청력을 거의 상실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고야의 증상에 관한 기록과 ‘검은 그림’에 나타난 표현에서 우리는 몇 가지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프란시스코 고야가 살았고 그가 지칭한 '귀머거리의 집(Quinta del Sordo)'
검은 그림 연작 중 <마녀들의 집회>, 프란시스코 고야, 캔버스에 유채, c. 1821-1823,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고야의 청력을 앗아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첫 번째 원인은 매독입니다. 고야가 활동했던 18세기 유럽에서는 매독이 유행했습니다. 고야의 아내가 20번이나 임신했으나 모두 유산하고 단 한명의 아기만을 낳을 수 있었다는 기록은 이 가설에 힘을 보태줍니다. 매독은 그 자체만으로 난청을 유발하며, 매독이 일으키는 뇌막의 염증으로 인해 청신경이나 청각기관이 손상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매독은 같은 원리로 시력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고야가 일시적으로 겪었던 시력 상실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매독의 발병에 따라오는 수은 중독을 통해 고야가 겪었던 신경학적, 정신적 질환들에 관한 추가적인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16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매독의 진행을 늦추기 위해 수은 연고를 사용하는 치료법이 보편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는데, 이는 수은 중독으로 인 한 뇌증(Encephalopathy)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고야가 매독의 치료제로 수은 연고를 지속적으로 사용했다면, 수은 중독에 수반되는 우울증, 시신경염, 어지러움, 수은 떨림(Mercurial Tremor)등을 함께 겪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납 중독의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정신의학자 윌리엄 니덜란드 박사는 고야의 치명적인 질환은 납 중독에서 기인했던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고야를 포함해 당대의 화가들이 사용했던 흰 페인트의 주요 제작 성분은 납탄산염 입니다. 고야는 한 작품을 대개 반나절에 다 끝내버리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런 습관으로 인해 다른 화가들보다 많은 양의 납을 빠르게 흡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니덜란드 박사는 고야를 제외한 어떤 화가도 그처럼 오랜 시간동안 같은 자리에서 인물의 초상을 완성해내지 못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때문에 고야는 인물을 살아 있듯이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지만 치명적인 부작용에 시달릴 수 있었습니다. 흰 페인트를 많이 사용하던 램브란트 또한 말년에 납 중독으로 시력 감퇴와 뇌손상을 앓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는 말년에 그려진 램브란트의 초상화에서 그의 눈동자가 초점이 흐리게 그려진 것에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한편 뇌졸중은 19세기 내내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제기되어 왔습니다. 뇌졸중으로 인해 청각 중추가 손상되면 청력 감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귀에 들어간 소리는 고막에서 진동 신호로, 이내 속귀에서 전기 신호로 전환되어 청신경에 전달됩니다. 청신경은 뇌간을 시작으로 복잡한 경로를 거쳐 청각 중추에 도달하여 최종적으로 우리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뇌졸중으로 인한 청각 중추의 손상은 소리의 크기보다는 소리의 질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박수를 치는 소리와 바위가 떨어지는 소리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뇌졸중은 대부분 한 쪽에 발병하여 한 쪽 청각 중추의 손상을 일으키는 것이 일반적인데, 고야는 양쪽 귀가 모두 들리지 않게 되었으므로 뇌졸중으로 고야의 증세를 설명하기에는 다소 설득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뇌졸중으로 양쪽 청각 중추가 손상되려면 의식을 잃고 한동안 중환자로 지내야 하는데, 고야의 경우 어지러움 외에는 신체를 움직이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귀의 구조와 기능

마지막으로는 메니에르병(Meniere Disease)이 있습니다. 메니에르병은 속귀에 발병하는 비교적 흔한 질병 중의 하 나입니다. 이 병에 걸리면 청력이 서서히 떨어지며 귀에 여러 개 소음들이 들리고, 이 소음이 커지는 것과 함께 때때로 어지러움과 발작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메니에르 질환만으로 고야가 만성적으로 어지러움을 호소했던 점과 시력이 함께 감퇴한 점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과학자는 메니에르병과 유사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희귀한 질병인 VKH(Vogt-Koyanagi-Harada) 증후군이라는 의견을 내놓습니다. VKH증후군은 여러 신경증상과 귀울림, 청력 감퇴를 일으키며 포도막염으로 인한 망막과 시신경의 손상을 유발합니다. 그러나 VKH증후군은 매우 희귀한 질병이며 자가면역계 이상 및 유전적인 영향에 기인하여 발병한다고 추정되므로 섣불리 고야의 병명으로 진단하기에는 이 또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칠흑같은 검정을 배경으로 하는 고야의 ‘검은 그림’들은 화면의 주인공에 격렬한 표현으로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청력을 상실한 고야는 감각을 입체적으로 활용해서 공간을 물리적으로 지각하기보다는 오로지 시각에 의존해 주관적으로 화면을 구성해냈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고야 자신이 눈길이 닿는 대상을 제외한 세계를 검게 칠해버린 것이 아닐까요? 청력과의 단절이 오히려 고야의 상상력과 해석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열어주었고, 온전히 본인만의 고유한 세계를 창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고야는 ‘검은 그림’ 연작을 통해 청력을 상실한 아픔과 그로 인한 광기를 예술로 승화시켜냈습니다. 고야뿐 아니라 광기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던 수많은 예술가들도 있습니다. 엘리펀트스페이스 특별상영작 <아트 앤 마인드>에서는 광기와 천재성에 관한 영화를 5월부터 상영합니다.

5월 9일부터 5월 18일까지 상영하는 <아트 앤 마인드>에서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을 분석한 인터뷰가 등장합니다. ‘띵스 오브 더 데이’에서는 고야가 ‘검은 그림’ 연작을 그리게 된 배경을 그의 청력 상실과 연계하여 몇 가지 접근 방법을 통해 작품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특별상영작 [아트 앤 마인드]
2019.05.09 - 05.18
총 10회 상영
장르: 다큐멘터리, 70분
가격: 1.5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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