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5월 31일은 '바다의 날'입니다. 1994년 11월 UN 해양법협약이 발효된 이후 미국은 매년 5월 22일을, 일본은 매년 7월 20일을, 뒤이어 한국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장보고 대사가 청해진을 설치한 날을 기리며 매년 5월 31을 '바다의 날'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바다의 날'은 세계 각국이 적극적으로 해양산업을 성장시키고 국민에게 바다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것으로, 일본에서는 바다의 날이 국경일이자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완도에서 각종 행사와 축제를 개최합니다. 그런데 같은 달 10일에 있었던 바다식목일과 '바다의 나무'인 해조류는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하게 남겨진 채 지나가버렸습니다.
바다와 해초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는 북해를 여행하던 중 바다를 보며 다양한 인상을 느꼈고, 바다가 자신의 영혼과 닮아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하이네는 물결에 따라 움직이는 해초에 시선을 집중하며 자신의 영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해초에 비유합니다.
"피어나는 순간만 살짝 수면 위로 올라왔다가 지는 순간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바다 속에 숨어있는 해초가 있다. 그처럼 내 깊은 영혼에서도 때로는 경이로운 꽃 형상이 헤엄쳐 올라와 향기를 풍기고 빛을 발하다가 그리고는 그만 사라진다."
하이네가 보았던 것처럼 과연 해초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을까요? 고대인에게 영혼은 오직 인간만의 배타적인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영혼은 인간의 외부인 자연에 내재했으며, 자연은 스스로 살아 움직였습니다. 영혼은 자연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이자 자연을 숨쉬게 하고 운동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탐구하며 식물, 동물, 인간의 분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위 세 종류의 생명체는 각각 다른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식물 영혼의 경우 양분 섭취와 생장이며, 동물 영혼의 경우 이에 운동과 감각을 더한 것, 그리고 인간 영혼의 경우 앞선 두 활동에 사고를 더한 활동을 통해 삶을 실현시켜나간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어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인 플로티노스는, 초월적 이데아의 세계를 전제하는 것에 있어 플라톤의 관념론적 전통 계승하고 있지만 세계가 구성되는 방식을 이전과는 다르게 설명합니다. 플로티노스는 세상의 모든 물질이 원자의 단순한 배열이 아니라 일자(一者, the One)라는 궁극적 원천으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일체의 관념과 지식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일자는 마치 빛과도 같으며 만물은 이 빛의 흘러넘침, 즉 유출(eklampsi)에 의해 생성됩니다. 빛에 가까운 순서대로 정신(nous), 영혼(psyche), 자연(physis), 그리고 질료가 되어 흘러나오는데, 이렇게 영혼이 정신을 본떠 형상을 만들어나가는 정도에 따라 자연 속에서 식물, 동물 혹은 인간으로 만들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플로티누스는 또한 인간의 영혼은 유동적이기 때문에 개인의 삶에 따라 정신적 영혼으로 상승하거나 식물적 혹은 동물적 영혼으로 추락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수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식물 중 콩을 유독 특별하게 생각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제자들에게도 콩을 먹는 것을 금기시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죽기 직전 반대파의 적군들을 피해 콩밭으로 도망쳤을 때도 콩밭을 망가뜨릴 수 없어 자포자기하고 붙잡혀 죽음을 맞았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이에 대해, 전생과 윤회를 믿었던 피타고라스가 콩이 인간과 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피타고라스에게는 콩을 먹는 것이 인육을 먹는 것과 같으며 콩을 파괴하는 것은 윤회의 길을 가로막는 불경한 행위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관이 지배하게 된 근대에 이르러 데카르트는 인간 외의 동물과 식물은 마치 물체와 같이 영혼을 가진다고 규정했습니다. 데카르트, 스피노자와 함께 17세기 최고의 합리주의론자로 꼽히는 라이프니츠는, 무한소 미적분을 창시하고 근대적 계산기의 원형을 발명했으며 모든 디지털 컴퓨터의 기반이 되는 이진법 체계를 다듬는 등 수학과 과학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성과를 달성했습니다. 그러나 수학자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이기도 한 라이프니츠는 인간과 동물 뿐 아니라 식물에 이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모든 생명체는 여러 성질을 지녔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단자와도 같은 모나드(monad)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라이프니츠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과학의 발전으로 식물, 동물, 곤충 등의 생명체들이 무에서부터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정자와 같은 씨앗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이와 같은 씨앗을 정충(spermatic)라 부르며, 그 안에 앞으로 전개될 존재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성을 지니고 있는 정충만이 인간의 모습으로 발현될 수 있지만, 수정되지 못한 정충 또한 영혼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 어떤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고 라이프니츠는 설명합니다. 이러한 견해들로부터 식물, 동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파괴되거나 죽음을 맞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그들은 곧 영원한 영원불멸한 우주를 표상한다는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난 옆에서 험한 말을 하면 난이 시들고 꽃이 피기 시작할 때 과도한 관심을 보이면 꽃 피우기를 멈춘다" 는 이야기는 난 애호가들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자연의 생물들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은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항상 우리 생활 속에 함께 있어 왔습니다. 식물들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고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해 왔으며, 이와 더불어 꽃과 나무들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노발리스의 『푸른 꽃』 등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육지의 식물들에 한정되었고, 바다의 꽃과 나무라고 말할 수 있는 해조류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부터 소외되어 왔습니다. 햇살과 빗물을 받고 자라는 육지의 식물들과 달리 바다의 식물들은 깊고 어두운 바다 속에서 자랍니다. 정식분석학자인 프로이트와 융은 각각 인간의 의식 구조를 빙산과 섬에 비유하며 무의식이라는 바다의 밀물과 썰물에 따라 의식이 드러나는 정도가 달라진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융은 각종 꿈, 신화, 전설등의 판타지에서 바다가 집단적인 무의식이 투사(projection)되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앞서 인용했던 하이네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쳐 왔던 해초의 존재와 그것이 지닌 영혼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시로 옮긴 섬세한 관찰력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면에 올라가지 않고 쌓여있는 모든 것들이 모여있는 바다에서 자라며, 물결 위로 잠시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해초들이야말로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있는 영혼에 대한 적절한 비유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식목일이 나무를 심어 황폐화된 산림환경과 생태계를 되살리고자 지정된 것처럼, 바다식목일은 전지구적인 기후변화와 함께 증가한 우리 해역의 수온 상승과 바다 생태계 변화에 뒤따르는 해조류의 훼손에 맞서기 위해 2013년에 우리나라에서 세계최초로 지정되었습니다. 바다 생물들에게 먹이와 보금자리를 내어주는 바다의 기초생산자인 해조류가 잘 자라지 못하게 된다면 바다 또한 사막화 현상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바다의 나무들을 조성하는 '바다식목'과 무의식의 바다 속에서 자라는 해초의 영혼이 지닌 상상력의 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