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역사는 수많은 전란과 환란의 고통 속에서 많은 희생을 요구했습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가 기억할 수 있는 변란의 모습은 사진과 기록 영상의 파편으로 바라보거나, 문학과 구술의 문장으로 남겨진 형태로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회화도 있었습니다. 전쟁을 주제로 표현한 ‘전쟁화’는 군의 사기 진작과 영웅 찬미를 목적으로 제작되곤 했습니다. 전쟁에서 인간의 비참함을 발견하고 이것을 화면에 담은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전쟁의 잔인함을 그린 작가는 매우 적었습니다. 한국전쟁은 대다수의 미술가들에게는 절박한 생존의 문제였고, 몇몇의 화가들은 전쟁의 폭풍 속에서 생존을 보존하는 수단으로 ‘종군화가’로 활동하게 됩니다. 오늘은 종군화가로 활동하며 한국전쟁의 비극적인 단면을 그리며 현실을 포착한 작가 이수억(1918-1990)을 소개합니다.
함경남도 정평 출신인 이수억 작가는 일제강점기에 도쿄 제국미술학교(現: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양화를 공부합니다. 1946년 귀국 후, 고향인 함경남도 미술동맹의 서기장으로 활동하며 리얼리즘을 실험한 이수억은 한국 전쟁 도중 월남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당시 대구에 위치한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로 활동하며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습니다. 그가 묘사한 <폐허의 서울>(1952)은 지금의 서울이라고 상상조차 되지 않을 만큼 처참한 모습입니다. 떠나가는 까마귀의 날개짓의 움직임과 대비되어 무너진 건물에 속 미동조차 없는 인물의 모습은 비참하게 묘사되었습니다.
당시 종군화가들에게 있어서 한국전쟁은 남과 북, 모두에게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전쟁 기간 중 제작된 많은 전쟁화는 폐허 속 동족상잔의 아픔으로 나타났습니다(휴전 이후 전쟁화는 주로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거나 영웅을 찬미하는 성격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작가 박수근과 김환기처럼 비극적인 상황을 단순하고 해학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작품도 있었으나, 이수억은 눈앞에 놓인 전쟁의 참상을 현실적으로 표현합니다.
<구두닦이 소년>은 위의 그림 <폐허의 서울>과 같은 해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소년의 오른쪽 어깨에는 가방이, 왼쪽 손에 들린 구두솔이 보입니다. 환란 속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소년의 고단함이 보이면서도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보입니다. 이 작품의 흥미로운 면은 소년의 뒤편으로 두 개의 상황이 대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먼저 전쟁 중 폐허가 된 건물 앞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노인이 목발에 의지하여 걷고 있습니다. 그 뒤로 보이는 단발머리의 소녀는 소년과 마찬가지로 생계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폐허의 건물과는 대비가 되는 오른쪽의 서양식 건물 앞에는 한국에 주둔하던 주한미군과 양장을 입은 여성의 모습이 여유롭게 쉬고 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전쟁 중 잠깐의 휴식을 만끽하는 모습과 전쟁 중 생계를 이어나가야 하는 일상으로 표현된 이 작품이 매우 사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의 흔적과 상처는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깊게 패인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전쟁의 아픔을 표현한 이수억의 작품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쟁의 기억으로 전해져 그 아픔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