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5일은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 영화감독인 장 콕토가 태어난 날입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 설가, 극작가, 영화감독인 장 콕토(Jean Maurice Eugène Clément Cocteau, 1889~1963)의 작품들을 보면 과연 한 사람의 것이 맞는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형태의 예술을 만들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09년 첫 시집 "알라딘의 램프(La Lampe d'Aladin)"를 발간한 콕토는 시, 소설, 음악, 회화, 무용 등이 한데 어울릴 수 있는 경험을 꿈꾸었습니다. 다양한 예술이 총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연극 이라는 장르에서 발견한 콕토는 이후 피카소, 사티, 디아길레프 등 그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가들과 관계를 맺으며 "지붕 위의 소(Le bœuf sur le toit)"와 같은 초현실주의의 발레극을 선보였습니다. 이어 "지옥의 기계(La Machine infernale)"에서 그리스 신화를,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셰익스피어를 재해석하고 본인의 미학적 해석을 덧붙이는 등 연극적 경험에 대한 갖가지 시도와 실험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여러 형태의 작품을 만드는 콕토를 사람들은 '마술사'라고 불렀으나 시인 프랑시스 카르코(Francis Carco)는 겉으로만 화려한 마술사, 사기꾼, 잔재주꾼, 코미디언이라고 혹평했습니다. 콕토는 과연 진짜 '마술사'였을까요? 아니면 카르코의 비난처럼 겉으로만 화려한 마술사였을까요? 이에 답은 콕토가 오르페우스 신화를 재해석 한 영화 '오르페우스 3부작(The Orphic Trilogy)' 나타난 시인으로서의 그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오르페우스 3부작(The Orphic Trilogy)'의 원형이 되었던 오르페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설적인 시인이자 음악가입니다. 그의 리라 연주는 동물들은 물론 바위와 나무까지 귀를 귀울이게 만들었으며, 아르고호 원정에서 동료들이 세이렌의 유혹적인 노래를 물리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님프 에우리디케를 아내로 맞지만,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고 맙니다. 비탄에 빠진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이승으로 데려오기로 결심했습니다. 오르페우스가 그녀를 애도하며 부르는 노래에 지하 세계의 수문장 케르베로스는 문을 열어주었고, 지하세계의 왕인 하데스와 왕비 페르세포네 뿐 아니라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마저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르페우스는 마침내 에우리디케를 데려갈 수 있다는 허락을 받지만, 이승에 완전히 도착하기 전까지는 뒤따라오는 그녀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빨려가게 됩니다. 영원히 에우리디케를 잃게 된 오르페우스는 지상에 돌아온 이후 소년들하고만 관계를 맺으며 예술에 전념했다고 전해집니다.
<시인의 피(Le sang d'un poète,1930)>, <오르페우스(Orphée,1950)> 그리고 <오르페우스의 유언(Le testament d'Orphée,1960)>으로 이루어진 오르페우스 3부작에서 오르페우스 신화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콕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평생 동성의 젊은 예술가들을 연인으로 삼으며 예술적 영감을 얻었던 콕토의 모습은 지하세계 여행을 마친 뒤 오직 소년들과 예술적으로 교류하는 오르페우스의 모습과 닮기도 했습니다. 콕토는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이질적인 두 세계를 오가는 시인의 역할에 매료되었습니다. 연인을 데려오기 위해 지하 세계로 떠났다가 다시 지상으로 귀환하는 오르페우스처럼, 콕토의 작품 속에서 시인은 죽음의 세 계에 들어갔다가 부활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콕토가 재해석한 오르페우스 신화는 더이상 사랑하는 이를 데려 오기 위한 연인의 여정만은 아닙니다. 콕토는 지하세계와 지상세계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던 능력이 되었던 오르페우스의 '시인'으로서의 자질에 초점을 맞춥니다. 오르페우스 연작을 통해 콕토가 그려내는 시인이란 이 세상이란 언어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입니다. 오르페우스 3부작의 첫 작품인 <시인의 피>에서 콕토는 "시인은 자기 마음대로 갖다놓을 수 있는 사람"이며 "얼굴, 손, 빛, 사물을 가지고 시를 쓰는 일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며 시인의 자유로움과 그가 가진 특별한 힘을 찬미했습니다. 마지막 작품 <오르페우스의 유언>에서는 직접 시인의 유령을 연기하며 유언을 남기듯 지난 삶과 작품을 회고하는데, "시를 써내려가며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삶의 세계에도 죽음의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오르페우스의 모습을 빌린 콕토는 말합니다.
콕토가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펼쳤던 여러가지 시도와 실험들은 그를 표면적으로 시인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 때문에 카르코와 같은 시인들은 물론이었고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화가 피카소마저 "그는 시인이 아니다. 저널리스트에 불과하다"라고 혹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콕토는 자신의 작품을 분류할 때 소설은 '소설시', 평론은 '평론시', 영화는 '영화시', 그리고 그림은 '서사시'라고 칭했습니다. 소설, 영화, 연극, 연주, 드로잉, 무대장식 등은 콕토에게 있어 결국 시가 표현되는 영역에 불과했습니다. 콕토에게 예술의 모든 형태는 시의 확장이었습니다. 오르페우스 3부작 또한 콕토가 자신이 오르페우스가 되어 시란 무엇인지, 또 시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짜 마술사'라고 콕토에게 가했던 비난은 사실 시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재능이 여러 방면에 표출되어 다양하게 변신할 수 있었던 '진짜 마술사' 였던 콕토에 대한 부러움이 아니었는지 카르코에게 되물어보고 싶어집니다.
콕토가 그렸던 것처럼, 오르페우스는 두 세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는 그가 갈망하던 육체의 한계를 초월하는 영원함에 도달하지 못하고 결국 사랑도 생명도 잃었습니다. 자신의 작품 안에서 새로운 오르페우스가 되었던 콕토는 과연 시인이 바라던 것을 얻었을까요? <오르페우스의 유언>에서 유령으로 나타난 콕토가 자신의 시신 앞에서 애도하는 친구들 앞에서 남긴 유언에서 단서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인은 오직 죽는 척을 할 뿐이기에 눈물을 흘리는 시늉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