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8, 2019

모든 것을 이기는 사랑

카라바조 Caravaggio, Italy, 1571. 모든 것을 이기는 사랑 Love Conquers All, 1601–1602.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56cm × 113cm. Gemäldegalerie, Berlin.

7월 6일은 키스의 날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모든 위대한 사랑 이야기는 키스와 함께 시작하고 키스로 끝납니다. 키스에 대한 사랑 이야기의 근원을 찾다보면 우리는 가장 인기 있는 플라톤의 경구시(Epigram)와 만나게 됩니다. “아가톤에게 키스할 때 내 영혼은 입술에 실려 있었네. 그 입술(영혼)은 어디에서 오는가. 가엾은 것. 영혼을 건너가고 싶네 (When I kiss Agathon my soul is on my lips, where it comes, poor thing, hoping to cross over).” 플라톤은 '아가톤에게'라는 이 경구시에서 키스를 처음 언급하며 ‘생명은 호흡이며, 입에서 입으로 숨결을 불어넣는 키스는 두 영혼의 합일’을 의미한다고 정의하는 것을 인터넷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플라톤의 18개 경구시(Eighteen Epigram)는 후대에 만들어졌으며, 대부분 가짜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위의 경구시만으로 플라톤이 키스에 관해 직접 이야기를 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출처가 불분명한 경구시가 아닌, 플라톤이 썼다고 알려져 있는 『향연』을 통해 키스와 사랑(에로스)를 말하지 않았을까요?

플라톤의 『향연』은 사랑(에로스)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맥락을 대화 형식으로 구성한 작품입니다. 이 대화에는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과 그리스 비극 시인 아가톤 등 총 일곱명의 주 연사들이 참여합니다. 대화의 내용은 가공이지만, 플라톤은 매우 현실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문학 형식을 갖춥니다. 사랑에 대한 각자의 이야기가 오고가는 이 작품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사랑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대신합니다. 키스와 사랑에 대한 플라톤의 입장을 확인해보기 위해 아가톤과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살펴보게 되는데요. 아가톤이 에로스에 대한 찬양 연설이 끝나고,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이때 이 둘의 대화에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소크라테스: 아가톤. 에로스의 본성에 대해 서론에서 말해줬는데... 나의 질문에 대답해서 조금 더 보충해주면 고맙겠네. 에로스의 본성은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이어야만 하는가. 또는 에로스는 대상 없이도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아가톤: 에로스는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소크라테스: 에로스는 자기가 사랑할 대상, 또는 사랑하지 않을 대상을 욕구하는가?

아가톤: 당연히 욕구합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그 대상을 소유하고 있을 때, 에로스는 욕구하고 사랑하는가? 또는 소유하고 있지 않을 때에 욕구하는가?

아가톤: 아마도 소유하지 있지 못할 때입니다.

소크라테스: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은 욕구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욕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단지 개연적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을 알게 될 것일세. 키 큰 사람이 키가 크기를 바라고, 힘 센 사람이 힘이 세기를 바라는 경우가 있을까?

아가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소크라테스: 그러한 성질을 갖는 자는 그러한 성질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자가 이미 갖고 있는 특성이나 성질을 욕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생각해보게나. 어떠한 특성이나 성질을 불가피하게 갖고 있으며 불가피한 것을 욕구하는 사람은 없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일세. 건강하고 부자인 사람이 건강과 부자를 욕구한다면 즉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욕구한다면 이는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앞으로도 계속 갖고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가톤: 옳은 말씀입니다.

소크라테스: 사람의 경우에도 우리 힘으로 다스릴 수 없거나 또는 갖고 있지 못한 것이 대상일 것일세. 우리들이 현재 받고 있는 축복을 앞으로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이 문제일거야. 그렇다면 욕구를 느끼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세력 속으로 들어와 있지 않거나, 소유하지 못한 것을 욕구하며, 욕구와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물이나 성질은 그 사람이 현재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결여 되어 있는 것이네. 그렇다면 우리가 이야기한 것을 요약해보세. ‘첫째 에로스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 ‘그 대상은 현재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정히마녀 맞는가?

아가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아가톤 자네의 에로스 연설에서 에로스의 대상이라고 분명하게 말한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신들의 분쟁은 추한 것에 대한 사랑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에 의해 진정되었다고 말한 것이 맞는가?

아가톤: 맞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사랑할 것이고, 추한 것을 사랑하지는 않겠지? 먼저 이야기를 나누었듯이 에로스는 현재 그에게 결여되어 있어서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사랑한다는 점에 우리는 동의했네. 그렇다면 에로스에게는 아름다움이 결여되어 있고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 되겠지?

아가톤: 불가피한 귀결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 결여되어 있고, 아름다움을 갖지 못한 것을 자네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겠나?

아가톤: 분명히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런데도 자네는 아직도 에로스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아가톤: 선생님이 그 말을 했을 때, 저는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조차 몰랐던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 자네는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동일하다고 생각하나?

아가톤: 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런데 에로스가 아름답지 않고 게다가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일치한다면 에로스는 선하지도 않네.

아가톤: 선생님 말씀을 감당하기가 어렵군요. 소크라테스 선생님, 선생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소크라테스: 천만에 아가톤. 자네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진리일세.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견뎌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일세. 아가톤 이제부터는 자네는 좀 쉬고, 내가 전에 만티네아에서 온 디오티마(Diotima of Mantinea)라는 부인에게서 들은 에로스에 대해 설명해보겠네.


소크라테스와 아가톤의 대화가 끝나고, 소크라테스는 만티네아의 디오티마 이야기를 말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랑(에로스)’의 기원, 본성, 목적에 대한 그 이야기를 계속하는데요. 플라톤은 소크라테스 입을 빌려, 디오티마를 통해 에로스 탄생 신화를 재구성을 시도합니다. 디오티마에 따르면 ‘사랑’은 아버지 ‘자원(Resource)’과 어머니 ‘가난’의 아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랑’은 양쪽 부모에게 기여를 받은 것이죠. 플라톤은 디오티마 일화를 통해 사랑은 근원적 결핍 속에서 끊임없이 상승하고자 하는 중간자적 존재로 재탄생하는 것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디오티마의 ‘사랑(에로스)’의 설명은 어떻게 ‘철학자’ 혹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되는지를 보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번식보다도 더 위대한 불멸성의 지적 아이들이 탄생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말이 끝나고 마지막 연설은 알키비아데스가 하게 되는데, 여기서 찬미하는 알키비아데스는 플라톤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야말로 정신의 아름다움 속에서 생산하고 아름다움 자체를 직감하는 진정한 사랑의 구현자라고 소크라테스를 찬미합니다. 이 연설은 르네상스 시기에 언급되기 시작한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의 개념의 기원이 됩니다.

플라톤은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영원히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망임을 드러내고, (그러나 욕망의 대상은 선善하며)그 대상이 되는 사랑(에로스)은 불멸의 이데아로 이끌어 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의 사랑은, 지혜(진리, 선)에 대한 사랑, 철학을 말하고 있습니다. 『향연』을 통해서도 키스를 직접 언급한 내용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위의 대화를 통해 유추해볼 때 플라톤이 '아가톤에게'라는 경구시에서 ‘키스 혹은 사랑(에로스)’에 대한 찬미를 했을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경구시가 가짜든 사실이든 상관없이 키스 관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의 시작은 '아가톤에게' 시처럼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에 끌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17세기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모든 것을 이기는 사랑”에게 이끌리듯이 말이죠.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