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2, 2019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이탈리아, 1884.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1905. ©Travel Papers

복잡한 영혼, ‘모딜리아니'

"내 이름은 모딜리아니이고 나는 유대인이다.” ("Je m'appelle Modigliani. Je suis Juif".)
20세기를 대표하는 보헤미안 화가로 알려져있는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는 자신을 소개할 때 종교적 정체성을 꼭 드러냈다고 합니다. 어느 화파에도 속하길 원치 않았으며,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로 살았던 그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 독특하게 느껴지는데요. 모딜리아니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일뿐만 아니라, 예술사조에서 여러 대가들의 형식을 이을 수 있는 가교역할을 하는 중요한 화가로 평가를 받습니다. 2018년 소더비 옥션에서 역대 최고가를 경신한 기록을 세우며 현대의 예술계에서도 가장 높은 작업적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삶은 어땠을까요? 7월 12일, 그가 태어난 지 135주년을 맞이하여 모딜리아니에 대해 조명해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그는 왜 본인의 정체성을 강조했을까요? 그리고 과연 그의 정체성은 그의 작품 세계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요?

모딜리아니는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투스카니 지방의 유대인들의 집단 거주지역인 리보르노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해변에 위치한 이 지역은 르네상스가 태동하는데 큰 기여를 한 메디치 가문에 의해 이상적인 휴양 도시로 계획된 곳입니다. 이곳은 지리적 특성상 다양한 외국인 집단이 모여 살아온 이국적인 도시로, 작가는 이러한 환경에 영향을 받은 조각작품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모딜리아니가 병마와 가난에 싸우며 불우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본래 그는 학식이 뛰어나고 매우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철학자들의 그리스도라 불리는 17세기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가 그의 모계혈통의 조상이라고 전해집니다. 그의 어머니는 갑작스런 경제 위기로 인해 부유했던 집안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학교를 설립해 집안을 일으킬만큼 교육적인 성향이 짙었습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할 위기에 처했지만, 모딜리아니의 탄생으로 집안은 몰락할 위기를 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고대 법에 이르길 채권자가 임신한 여성의 재산을 몰수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그의 가족은 가장 귀중한 자산을 내놓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교육적인 어머니의 관심 덕분에 그는 자신의 재능인 그림을 일찍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여자의 머리, 1912, 석회암, 68.3 × 15.9 × 24.1 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20세기 당시 예술계가 아방가르드로 변화하는 시기에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화풍을 정립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모딜리아니는 많은 예술가와 친분을 두텁게 쌓으며 영향을 주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카테고리에 소속되길 거부합니다. 그는 파리에서 르누아르, 피카소, 고갱, 세잔, 마티스 등과 같은 예술사조에 한 획을 그은 화가들을 비롯해, 조각가 브란쿠시와도 친분이 각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미술작품은 초상화와 누드화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초상화에서 인물의 얼굴을 세로로 과장되게 늘어뜨린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이후 매너리즘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외할아버지의 권유로 독서량이 풍부했는데 특히 철학작품을 많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작가 중 니체에게 깊은 영향을 받아 그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며 반항과 무질서를 통해 진정한 창조력을 발현할 수 있다고 믿게 이르렀습니다. 그가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작품에 진지하게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페인팅은 $2-4달러, 드로잉은 4센트에 팔렸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친구이자 이웃인 브랑쿠시에게 영향을 받아 1909년부터 1914년까지 약 5년 정도 조각 활동에 매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로댕과 같은 조각가들이 쓸데없이 너무 많은 석고를 낭비한다고 비판하며, 진정한 조각가라면 돌을 직접 깎아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국적인 환경에서 살아온 그의 배경 때문에, 그가 아프리카를 포함한 부족미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권에 영향을 받은 작품을 생산했습니다. 하지만 어릴적부터 여러 질환으로 인해 허약했던 그의 몸은 조각에서 나오는 돌먼지로 인해 더욱 악화되어 조각활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의 조각작품 또한 당시 예술계에서 큰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조각 작업 이후에 오히려 그의 작품세계는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예술사가 타마르 가르브(Tamar Garb)는 모딜리아니가 조각작업을 함으로써 형태를 단순화하고, 가능한 한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물체의 정수를 보여주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조각작업의 영향으로 그의 화풍은 단순하고 비정상적이지만 개성적인 작품이 탄생하게 됐습니다.

잔 에뷔테른 초상, 1918, 캔버스에 유채, 46x29cm, 개인콜렉션

1917년 모딜리아니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한 명인 그의 연인 잔 에뷔테른(Jeanne Hébuterne,1898-1920)가 그의 인생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녀는 당시 19살의 미술학도로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종교의 다름으로 인해 그녀의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그들은 첫번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그녀를 잔과 같이 동명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들이 두번째 아이를 임신했을 당시 모딜리아니는 원래 만성적으로 앓고 있던 폐결핵이 심해져 죽음에 가까워져 있었습니다. 그가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게 되고 실의에 빠진 잔은 자살을 시도하게 되고 뱃속의 둘째 아이까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녀의 첫째 아이 잔(Jeanne Modigliani, 1918-1984)은 훗날 성장해 미술사가로서 그녀의 아버지의 작품을 토대로 한 《모딜리아니: 인간과 미신》이라는 전기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누워있는 누드, 1917, 캔버스의 유체, 89.5 x146.7 cm, 소더비옥션

모딜리아니는 본인을 유대인 예술가라는 것을 강조했지만, 전문가들은 그의 작품에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증거가 없다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가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1906년에는 민족주의가 만연한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발언에 대한 해석이 모호하기도 합니다. 그가 예술가이지만 어쩔수 없이 유대인이라는 것인지 그의 작품에 유대인의 요소가 있다는 것인지에 대한 혼란도 따릅니다.
“꿈을 이루는 것은 의무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성공한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그가 생전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36세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그의 그림이 한 세기가 지난 후에 1000배에 달하는 가치로 평가되었습니다. 살아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자신의 마음 속에는 그림의 뛰어난 가치를 알았을까요? 그의 생일을 맞아 앞서 나갔지만 사후에서나 빛을 보게 된 다른 대가들도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가난한 삶을 살았지만 사후에 비로소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는 화가들의 삶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