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년전 오늘, 대한제국 시기 영국 국적의 한 언론기자는 항일운동에 앞장선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습니다. 이 신문은 한국어와 영어로 제작되었고, 일제 침략 이후 독립 운동 발생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역사적인 의의가 높은 신문이었습니다. 항일 논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고,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던 이 민족지는 어떻게 탄생하고 어떤 가치를 남겼을까요?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민족을 구하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타국에서 생을 마감한 영국의 언론가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1905). 의미있는 과거의 오늘을 반추하며 그의 업적에 대해 조명하고자 합니다.
영국 출신의 베델은 17세의 나이에 일본의 고베에서 약 16년간 무역상으로 활발히 활동하다 1904년 대한제국의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의 만주 지역에 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일으킨 전쟁때문에, 영국에 이에 관한 상황을 보고할 특파원의 임무로 그는 조선에 도착합니다. 본 목표와는 달리 그는 조선 정세의 불합리한 상황을 목격하게 되면서 생애의 마지막까지 언론인으로서 직업적인 신념을 타국에서 바치게 됩니다. 낯선 나라에 도착한 지 한 달 무렵의 되었을 때 그가 신문에 실은 기사는 “폐허가 된 대한제국의 왕궁(Korean Emperor's Palace in Ruins)”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데일리 크로니클>에서 기자직을 잃게 됩니다. 영국과 일본은 1902년 영일동맹(Anglo-Japanese Alliance)을 맺고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추구하였으나, 베델의 기사로 인해 양국의 외교관계과 악화될 것을 우려해 그를 사퇴시키라는 영국 정부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종황제는 베델에게 “배설(裵說)”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그가 국내에서 활동하는 데에 있어 비밀리에 자금을 대주는 등 여러 편의를 제공했다고 합니다. 언론사에서 사임한 이후, 한일관계의 부당함을 절실히 깨달은 그는 독립운동가 양기탁(1871-1938)과 함께 민족진영 인사들에게 지지를 받아 1904년 7월 18일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에서는 국한문, 순한글, 영어로 구성된 3가지 종류의 신문을 발행 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한국의 언론을 통제하고 검열하는 상황이었지만, 영국인 베델이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탄압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대한매일신보>는 항일 논조를 굳건히 유지하며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의 본부 역할을 하기에 적합한 본거지가 되었고, 이에 따라 민중들의 지지도가 높아 신문의 발행부수도 1만부에 달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국채를 보상했다는 명분으로, 일차적으로 조선의 경제를 예속시켜 식민지 건설을 위한 작업을 진행중이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민족자본가와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각계각층이 참여해 국채보상운동을 실시하게 되는데요.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해 중심체 역할을 하며 애국운동과 민족계몽을 위한 신교육을 알리는 일에 큰 이바지를 하였습니다.
베델이 신문을 창간할 당시 일본은 한국의 황무지 개간권에 대해 주장할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대한매일신보>는 독자투고란을 통해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윤치호의 글을 빌려 비판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의 억울함을 폭로하는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의 후속기사를 알림으로서 논조에 힘을 싣고, 영어로 번역해 세계의 여론에 조선의 입장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타국의 주권회복을 주장하며 그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 또 하나 있습니다. 현재 국보 86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하고 있는 경천사지십층석탑의 반환입니다. 당시 일제의 여러 만행을 알리며 그가 알게된 또 하나의 사실은 일본인 다나카가 비밀리에 개성의 경천사에 있는 석탑을 일본으로 빼돌리며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기사를 신문에 실음으로써 국내 뿐만 아니라 외국의 독자들도 문화재의 약탈 소식을 알렸고, 일본인들에게도 이 사실에 대한 반발심을 일으키게 해 1918년 일본은 이 석탑을 경복궁으로 다시 돌려 보내게 되었습니다.
베델의 구국을 위한 행보는 영국 정부에서도 제지할만큼 심각한 외교 문제로 받아들여져 그는 결국 소송에 회부되었습니다. 잇따른 소송으로 심신이 쇠약해진 그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3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히게 되었고, 그의 비석을 세우기 위해 이듬해 국민들이 모금운동을 펼쳤습니다. 1년 뒤 1910년 6월 그를 위한 비석이 제작되었고, 비석에는 당시대의 논객 장지연의 비문이 새겨졌습니다. 베델의 사후에 일본은 그의 영향력을 못마땅하게 여겨 비문을 깎아 없애는 잔인박행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의 비석 옆에 1964년 서예가 김응현이 비문을 복원한 새로운 비석을 세워, 두 비석은 나란히 서서 더 큰 메시지를 전합니다.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일을 맞아, 베델뿐만 아니라 위태로웠던 우리의 역사에서 자신의 생을 희생한 모든 타국의 유공자분들께 깊은 존경을 바칩니다.